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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라일락향기
라일락 향기 / 김영현 소설집
풍화하는 시간 속에서 영원회귀하는 저 꽃!
라일락 향기 / 김영현 소설집
"젊었을 때는 소설을 꾸미기에 급급했지만,이젠 욕심을 버리고 마음 편한 대로
중얼 거린다”며 10여 년 만에 신작소설집을 낸 작가 김영현 / 허영한 기자
예술영화의 거장인 러시아 영화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인간은 너무나
고통받아왔고, 고통에 대한 감각이 마비되었다"며 '고통 불감증'을 현대인의 가장
큰 질환으로 꼽았다. "이것이 위험스럽다. 왜냐하면 그것이 뜻하는 것은 피와 고통을
통하여 인간을 구제한다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 기막힌 시대이다!" 그러나 타르코프스키는 종교, 철학, 예술을 가리켜 '세계가
기초하고 있는 세 개의 기둥'이라며, 인간의 영성(靈性) 회복 가능성을 세 가지
정신활동에서 찾았다. "인간은 자신이 어째서 하나님이나 철학이나 예술을 필요로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본능적으로 그것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칸 영화제
수상작인 그의 영화 《향수》 《희생》등은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예술 작품으로
추앙 받고 있다. 그는 영화를 통해 인류 구원의 길을 탐구했을 뿐 아니라
영혼과 육체, 이성과 감성의 통합을 시도했던 시인이자 사상가이자 구도자였던 셈이다.
김영현의 소설집 《라일락 향기》는타르코프스키의 영화처럼 종교, 철학, 예술
3대 요소가 조화를 이룬 고품격 서사의 세계를 그려낸다. 7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책의 수록작들은 '유신 세대'의 작가 김영현의 내면 풍경을 채우는 다양한
구성요소들을 때로는 제각각 때로는 한꺼번에 펼쳐 보인다. 기독교의 부활과
불교의 윤회, 헤겔의 변증법을 통해 본 20세기 세계사, 서정성과 현실성의 조화 등
다양한 모티브와 테마가 서로 어우러져 있다. 책 제목이 된 작가의 최신작
〈라일락 향기〉는 엘리어트의 시 〈황무지〉를 화소(話素:이야기의 최소 단위)로
차용해서 쓴 소설이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라는
시가 노래했듯이, 소설 〈라일락 향기〉는 시간의 풍화 작용 속에서 소멸됨에도
불구하고 영원회귀하는 생명의 꽃을 감각적 이미지들에 의지해 형상화했다.
'얼음은 물이 되고, 물은 수증기가 되듯, 땅에 묻힌 육체가 거름으로 변해 나무도
되고 꽃이 되면서 영혼이 자유롭게 돌아다닌다'는 소설 속 에피소드를 통해 작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죽은 것은 아니야"라고 말한다. 철학 개념으로는 풀이할 수 없는
부활의 의미를 일상 풍경 속에서 연극 기법으로 그린 소설이다.
이 책에 실린 또 다른 단편 〈개구리〉는 세기말의 대전환이 일어났던 지난 1999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작가 자신과 그 또래 세대의 '20세기 비망록'으로 읽힌다.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가 공권력의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분열증을 앓는 철학도 '이공'(李公)의
내면일기가 펼쳐진다. '생의 한때 나도 내 운명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그때 나는
부끄럽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다만 외로웠을 뿐이었다'며 청춘을 보냈던 세대. 하지만
그들은 사회주의 몰락과 함께 혁명의 꿈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서둘러 반성문을
써야 했다. 그러나 냉전붕괴 이후 세계에 실망한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빌어 '이제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새로운 형태의 꿈'을 꿀 때가 됐다고 외친다.
지금은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황혼기라는 것이다. 혁명의 꿈을 상실한 세대의 내면은
'마치 꽃이 다 저버린 폐허 같은 정원'과 같지만, 그 위로 부엉이 한 마리 날아간다.
헤겔이 철학의 표상으로 삼았던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아직 멸종되지 않는 한
미래를 향한 인간의 이성적 기획은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