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야칼럼
18세기를 풍미한 프랑스 사상가이자 소설가 장자크 루소는 수많은 여성 팬을 거느린 유명인이었다. 루소가 죽은 뒤 그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는 패키지 상품인 ‘루소 투어’가 생겨났을 정도였다. 대단한 바람둥이였던 그에게는 정력가라는 이미지가 따라다녔는데, 그가 인삼을 애용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인삼이 정력에 좋다는 세간의 인식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외과 의사였던 존 로크의 일기에서도 인삼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로크는 인삼이 아시아에서는 열병과 성병 치료제이자 강장제 기능을 한다는 노트를 남겼다.”
위대한 철학자이자 미적분을 발견한 수학자로 유명한 라이프니츠도 인삼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중국의 문물을 유럽에 소개하는 구실을 했던 예수회 신부 클라우디오 필리포 그리말디에게 “인삼 뿌리가 (…) 그렇게 약효가 좋은가?”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리말디가 보내온 답변을 이렇게 요약했다. “인삼 뿌리 1파운드는 중국에서 대략 40스쿠도(19세기까지 사용한 이탈리아 은화 단위)에 팔린다. 인삼 뿌리는 특히 나이 든 사람에게 매우 효과가 있다.” 라이프니츠는 루이 14세가 중국으로 파견한 최초의 프랑스 출신 예수회 선교사 조아킴 부베에게도 인삼에 관해 물었다. 1687년부터 청나라 황제 강희제에게 천문학과 의학, 화학을 가르쳤던 부베는 이렇게 답한다. “인삼 뿌리는 특히 한국(조선)과 요동에서 자랍니다. 요동의 인삼이 특히 가장 좋습니다. 요동의 인삼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황제에게 진상됩니다.”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가 쓴 <인삼의 세계사>는 인삼에 관한 거의 모든 기록의 보고(寶庫) 같은 책이다. 설 교수는 1995년 미국에서 ‘아메리칸 진생 페스티벌’을 우연히 보게 된 뒤 ‘미국 인삼’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고, 19세기 영국의 소도시에서 발간된 신문 기사를 모아놓은 데이터베이스에서 재미 삼아 ‘ginseng+Corea’를 검색했다가 무려 200건이 넘는 기사가 쏟아지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서양 사람들이 도대체 왜 19세기에 한국산 인삼에 대해 관심을 가졌단 말인가? 그런데 왜 역사서에는 한 줄도 다루지 않았던 것일까?” 설 교수는 “씁쓸함과 궁금증, 약간의 오기가 발동”해, “동인도회사 보고서부터 관세율 차트, 약전(藥典)과 본초학서, 미국인삼재배자협회 회의록에 이르기까지 한 줄이라도 인삼을 언급한 자료라면 닥치는 대로 모았다. (…) 그리고 그렇게 중요한 인삼을 서구 역사학에서 전혀 다루지 않았던 이유를 규명해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생겨났다.”
17세기 초 인삼이 유럽에 처음 소개된 뒤 서양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식물인 “맨드레이크처럼 두 개의 다리로 갈라져 있다”며 반가워했다. 영국 요크셔의 개업의였던 윌리엄 심슨은 1680년 <동인도에서 수입한 닌징이라 불리는 뿌리에 대한 고찰>에서 “‘인삼 한 꾸러미’를 이용해 환자를 치료한 결과 ‘놀라운 성공’을 경험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하지만 심슨이 사용한 인삼은 일본 인삼인 ‘닌진’이 아니라 고려인삼, 즉 ‘진생’이었다. 어쨌든 당시 영미권 의료계에서 인삼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친숙한 약재이자 처방이었다. 1736년에는 프랑스에서 인삼에 관한 첫 박사학위 논문이 나왔다. 뤼카 오귀스탱 폴리오 드 생바스가 쓴 <인삼, 병자들에게 강장제 역할을 하는가?>라는 논문이었다.
하지만 인삼은 워낙 까다로운 식물이어서 재배지뿐 아니라 건조 방법, 보존 상태에 따라 약효가 천차만별이었다. 특히 약효가 가장 뛰어난 고려인삼은 워낙 구하기가 어려웠다. “인삼 수급이 원활치 않자 영국 의학계는 오히려 효능을 폄하하며 가용 약재 목록에서 배제하는 조처를 했는지도 모른다”고 지은이는 썼다. 영미권의 약전이나 약물학서에서 인삼 효능을 깎아내리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18세기 후반부터였다.
1716년 캐나다에 이어 미국에서도 야생 삼이 발견되면서 중국으로의 수출이 시작됐지만, 동아시아삼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싸게 팔렸다. 오래 보관하려면 건조 방법을 터득해야 하는데 1000년 이상 비법을 갈고닦아온 동아시아를 따라잡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그래도 “프랑스 상인들이 가져간 캐나다 인삼을 중국 상인들은 아시아삼과 섞어 팔아 엄청난 이익을 남겼다. 물론 프랑스 상인들도 큰 재미를 보았다.” 특히 미국에서는 애팔래치아 산맥 주변인 테네시와 켄터키, 웨스트버지니아를 중심으로 백인 채삼인들이 대거 출현하면서 일종의 산업으로 발전했고, 지금도 위스콘신 등을 중심으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중국인들은 신생 독립국가인 미국 국민을 “새로운 사람들”(new people)이라고 불렀고, 그들이 가져온 북미삼을 화기삼(花旗參)이라고 불렀다. 성조기에 박힌 별들이 그들 눈에 마치 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서양이 인삼을 역사에서 지우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인삼의 유효성분을 추출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게 지은이 견해다. 19세기 초 커피의 카페인, 아편의 모르핀, 담배의 니코틴 같은 유효성분이 속속 발견됐지만, 인삼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밝혀진 인삼의 주성분 사포닌은 한 분자 안에 비극성 분자와 극성 분자가 공존하는 화합물로, 비누처럼 거품을 일으키는 물질인데, 당시 기술로는 이를 정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삼의 생산과 수출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음에도 서양이 인삼을 타자화하게 된 배경에는 인삼 가공 기술에서 동아시아에 결코 범접할 수 없다는 열등감과 내다 팔기에 급급한 나머지 내수화는 요원했던 경제적 이해관계가 깔려 있다. 그런데 인삼에 투영된 오리엔탈리즘은 인삼 채취를 업으로 삼는 심마니에게도 투사되어, 미국의 심마니에게는 낙후되고 반사회적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진다. 불가해한 동양의 물건인 인삼에 생계를 걸고 있는 미국의 심마니들은 오늘날까지도 내부적 식민지인이나 마찬가지인 정체성을 부여받고 있다.”